“임진왜란...‘천행’과 ‘기적’ 그리고 이순신의 정보력 사이 '어란'여인의 등장”

 
1597년 정유재란 칠전량해전 원균의 패배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명량대첩은 416년 전 1597년 9월16일 오전부터 초저녁까지 해남 울돌목에서 133척의 왜선을 겨우 13척의 배로 완벽하게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이를 따른 의로운 전라도 민초들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승리였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전쟁은 1597 정유년 전열를 다시 정비한 일본군이 조선을 재 침범하여 그해 7월 일본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칠천량에서 대파하면서 조선수군은 궤멸되었다.

이어, 남원과 진주를 떨어뜨린 일본군은 서울로 진격하고 일본수군은 남해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 서울에서 내륙군과 합세하여 조선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백척간두에 이른 조선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8월 3일 선조는 교서를 통해 “이순신의 지위를 박탈하여 오늘 같은 치욕을 당했다며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하며 후회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13척의 함선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칠전량 승리 후 일본 수군은 서들러 남해안을 따라 서해로 향했고 이순신은 반드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야 나라를 구할수 있다는 신념하나로 구례-곡성-압록-순천-낙안-보성-장흥-강진을 지나 전열을 높이면서 조선수군은 해남 어란포에서 일본수군을 격퇴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승기로 삼은 곳은 해남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해협 울돌목, 일본군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갈 것임을 이순신은 간파하고 진도 벽파에 진을 쳤다.

영웅 이순신, 지략과 정보전 그리고 천행이 불러 온 기적같은 승리

이때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대장을 한 일본군은 어란포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이순신은 진도 벽파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량해전 하루전인 9월 15일 갑자기 진을 해남 우수영으로 옮긴다.

1597년 9월 16일 133척의 왜선이 명량으로 들어오고 이른바 13대 133의 전쟁,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전쟁, 이 기적과도 같은 전쟁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글을 써가며 독려한 이순신과 구국의 일념으로 이 장군을 따른 민초들이 승리한 전쟁, 그러나 이순신 스스로도 이 명량해전은 ‘천행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힘든 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 중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23번의 싸움에서 단 한번의 패배도 없이 전승을 거뒀다. 이 전무후무한 전쟁의 승인을 돌아보면 충무공의 충정과 구국의 일념, 그리고 그의 뛰어난 지략과 여기에 잘 알려진 정보력(첩보전)이 뒷받침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정보력을 말해주는 한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의 경우 정보에 목숨을 걸었다. 관할구역이 아니었던 경상도의 물길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인재를 보내고 부산으로 스파이를 잠입시키고 출격시에도 항상 현지민을 통해 적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그 결과 1,2차 출격때에는 모두 적의 배후를 기습해서 압승을 거두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구국의 여인 '어란'의 등장 "나는 김해인 이다" 명량해전 그 드라마틱한 승리

명량해전 이틀 전 9월 14일자 난중일기에서 “(김중걸의)말이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을 듯해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란민들을 육지로 피하라고 타이르도록 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해전 하루 전 갑자기 벽파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것은 그의 정보력을 말해 주는 하나의 대목이다.

이와 연관되는 것은 일제강점기 해남에서 순사를 지낸 사와무라 하지만다로의 유고집 48,49쪽에서 ‘어란진에 주둔한 스가 마사가게는 이순신군의 간첩인 미기(美妓) 어란과 애인관계로 사랑에 빠져 명량해 출전기일을 발설한다. 어란은 이를 이순신군에 연락한다’라고 적었다.

어란 여인을 발굴한 박승룡씨는 “어란 여인의 애인 간 마사가게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로 확인됐고, 주민들의 구전과 일본인의 기록, 그리고 명량해전에 관한 기록인 난중일기(1597년 9월 14일자 어란진에서 있었던 일로 김중걸이 왜에 붙잡혀 왜선에 감금될 때 ‘김해인’ 이라는 여인이 결박을 풀어주며 기밀을 제공했다)와 조선왕조실록 기록(선조 30년(1597년) 이순신은 왜선중에서 여인으로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즉, 조선인 김중걸이 왜군에게 붙잡혀 마사가게 앞으로 끌려왔는데 죽임직전에 누군가의 구명으로 김중걸이 풀려난다. 이 누군가는 김중걸이 떠나기 전 “나는 김해인”이라고 안심시킨 뒤 “‘왜놈들이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을 모두 몰살한 뒤 바로 경강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하더라.’는 말을 우수영에 전하라.”고 귀띔했다는 것.

구국의 여인 ‘어란’은 이렇게 등장한다.

1597년 9월 16일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 13대133의 전쟁에서 승리한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 그리고 민초들의 승리. 이순신 장군의 22전22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 기적에 가까운 싸움에서 승리한 이순신도 “천행 이었다”고 할 만큼 드라마틱한 역전승이었다. 이 드라마 같은 해전의 승인에 ‘어란’여인이 등장한 것이다.

과학적으로 풀리지 않는 쇠사슬을 비롯하여, 피섬과 노적봉이야기 등과 지금도 사실로 확인된 휴머니즘을 완성한 진도 왜덕산 이야기와 함께 ‘어란’여인의 실체가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서 그 사실을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진주에 '논개‘가 있었다면 해남에는 ‘어란’이 있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어란이야기는 해남 송지면 박승룡(84세)옹의 피땀흘린 노력으로 그것이 구전이든 사실이든 자연스럽게 명량해전과 연관을 지으며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냥 지나쳐 버리면 영원이 감춰질 소중한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박승룡 옹이 밝힌 ‘어란’이야기 첫 마디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왜선이 어란포를 출발하는 시각을 이순신에 알려준 어란 여인이 명량해전에 등장하는 것은 결코 놀라울 일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박 옹이 어란 여인을 발굴하게 된 것은 2007년 자신과 안면이 있는 일본의 히로시마수도대학 히구마다게요시(日隈健壬)교수의 부탁을 받고 임진왜란때 해남에 일본인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기록이 담긴 문헌을 일본에서 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 문헌은 일본 해남회에서 발간한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이었는데 그 유고집 내용은 놀랍게도 명량해전에 일본이 대패한 사유가 이순신 장군이 ‘어란’여인을 이용한 첩보전에 기인한 것으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평문과 한시로 수록이 되어 있었다는 것.

사와무라 하찌만다로에 대해서 박 옹은 “일제강점기 해남에서 19년동안 순사로 있으면서 우리말에 능통했으며 중국고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연구하는 한편 한시에도 나름 일가견을 갖는 한학자로 많은 저서와 잡기록을 남긴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박 옹은 “그가 일본사람이고 순사라는 직업이 직업이어서 그 진위가 의심이 안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잡기록에 의하여 해남 삼산면 포로수용소 문제가 사실로 인정된 이상 그저 날조한 것이라만 볼 수 없어 현장인 어란 마을에 가서 현지를 답사하여 주민들의 증언을 들었더니 사와무라의 기록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고 밝혔다.

박승룡 옹은 “그냥 지나쳐 버리면 영원이 감춰질 소중한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동안 고민도 했다”면서 “그러나 한번 되집어 볼 만한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고 한 낮 설화에 그친다 하여도 꽤 괜찮은 관광 아이템으로 생각하여 역사가는 아니지만 고증 찾기에 나서보았다”고 전했다.

박 옹의 끈질긴 노력으로 ‘난중일기’에서 ‘왕조실록’에서 그리고 김 훈(金 薰)의 ‘칼의 노래’에서 근사한 고증을 찾는데 성공하고 비로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작심하였다고 재차 밝혔다.

하여 ‘어란’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저명한 인터넷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당시 해남군수 권한대행으로부터 “우리 후대를 위해 이것을 책으로 엮어달라는 청을 받았다”고 말하고 “그 후 뒤늦게 전라남도가 알게 되어 도비로 제가 편저한 ‘어란 자료집’을 발간해 주고 또 많은 비용을 들여 뮤지컬을 두 차례나 공연해 주었다”고 그간의 경과를 설명했다.

300만원 지원, 쉬쉬하는 해남군 영암 왕인박사 유적지 타산지석

그러나, 충무공 관련 사업회 등과 일부 지역사회가 "일본인의 유고집에서 주장하는 역사 기록을 갖고 명량대첩을 왜곡, 폄하하고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짓밟는 또 다른 역사왜곡" 이라며 ‘어란’ 여인의 등장을 강력하게 반발하자 해남군에서도 꺼림직하게 여기고 별다른 지원이나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남군은 겨우 지난 2011년 어란 당집을 향토유적으로 지정하면서 “어란 당집은 바다에 인접해 있고 당시 민초들의 기복신앙을 알 수 있는 형태로서 당집의 건축구조 양식이 비록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으나, 전남지방에 남아있는 당집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지붕의 기와를 토기와로 쓰고 있는 점 등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의견을 모았다”면서 “하지만 임진왜란과 관련한 '어란'이라는 여인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의결했다”고 확실히 발을 뺐다.

지난해 12월 20일 해남군 송지면 어란마을 뒷산 여낭터(어란 여인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낭떠러지) 인근에 <어란여인 이야기>이야기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 비문을 읽어보면,

어란여인이야기

‘정유재란 때에 일본장수 칸 마사가게(菅正陰)는 송지면 어란진에 주둔하던 어느 날 그의 여인인 ‘어란’에게 출병의 기일을 발설했다. ‘어란’여인은 그 사실을 이순신에게 전하여 명량해전의 중요 승인이 되었다. 이로써 ‘어란’여인은 나라를 구했으나 자신의 연인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비관하여 여낭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어느 어부가 그 시신을 거두어 바닷가에 묻어주고 석등롱(石燈籠)을 세워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해남에 근무했던 모 순사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는 많은 언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국악뮤지컬과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등, 새로운 이야기들로 발전해 가고 있다. 어란마을의 당집과 여낭, 석등롱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를 이룬다

글 국립목포대학교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 원장
2012년 12월 20일
해남군

이렇게 되어있다. 분명 해남군에서 지원한 비석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석은 300만원의 예산을 들여 해남군에서 극도로 보안을 유지해 가면서 해남 인근 석재상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떳떳치 못한 해남군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다면 이정도 이야기만 가지고도 충분한 관광 상품화도 가능한 것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박 옹은 토로했다.

실제로 해남군 관계자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어란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실존인물이냐’와 ‘설화 속 인물이냐 인데...다른 분들이 이의제기 해 놓은 것을 보면 그것은 설화고 창작극이고 이렇게 결론을 학자들은 내 놓고 있어요. 거기에서 주장했던 실존인물 반박자료도 많이 있거든요...(어란보존현창회)거기서 주장한다고 해서 그 분 의도대로 다 지원해주기는 어렵지 않겠냐 이렇게 판단하고 있어요"라고 밝혔다.

덧붙여 이 방송은 “이처럼 논란만 계속되기 보다 학계에서 체계적인 역사 고증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자치단체의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며 “영암군의 왕인박사 유적지도 우리 기록에 없지만 일본 기록을 참고해 유적지가 복원됐던 것처럼 어란 여인의 얼을 자치단체와 학계가 나서 깊이있는 학술적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박 옹은 지난 기고문에서 “나는 무엇 때문에 ‘어란’여인에 매달려 80의 중반에 이르도록 우직하게 외로이 어두운 밤길을 달려왔을까?”반문하고 “내가 썼다가 버리고 또 쓴 서류 봉투가 아마도 한 트럭으로 가득 싣고도 남을 것”이라며 “일본으로는 월 평균 20회의 전화 통화에 하루 한 두차례의 메일이 일어로 왕래한다. 일을 하는 데에는 돈이 들기 마련인데 무직인 나에게는 수입이 없다”고 한탄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에게 승리의 꽃다발을 안겨준 여인

박 옹은 ‘어란’여인의 등장에 대해 “취미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면서 “그것은 ‘어란’여인에 대한 나의 믿음이요, 반성과 관용 정신의 제고, 나아가 평화를 희구하는 나의 갈망을 작은 힘이나마 한 일 양국에 널리 알리고자하는 ‘나도 모르는 무아의 행군’이였다”고 술회했다.

박 옹은 다시 반복하며 어란 여인의 이야기가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실존에 가까운 사건임을 주장하며, 이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깎아내리거나 이로 인해 장군의 업적에 흠을 내는 것은 결코 아니라면서 “이러한 착상과 구상을 바탕으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에게 승리의 꽃다발을 안겨준 여인, 나라를 사랑하지만 의를 지키며 목숨을 버린 어란 여인의 호국정신, 이를 우리지역의 또 하나의 문화콘텐츠화 하여 지역발전에 이바지 하자는 게 이 노인의 바램이다”고 강조했다.

 
다시 박승룡 옹이 주장하는 어란 여인의 등장을 설명하면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1597년 다시 조선을 침략한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에서 대승한 일본군 수군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군의 주장 칸 마사가개(菅 正陰)는 경상남도 통영을 근거지로 남서해안에 진출하게 된다. 이에 더 나아가 전라남도 여수(좌수영)을 밟고 해남(우수영)을 치고 경강으로 올라가기 위해 수로 중 가장 험난한 장소인 명량해협을 탐사 차 해남 어란진에 주둔하게 된다. 선박 수리나 진군준비를 위해 정박 중이던 일본군은 주색에 빠지게 되고 특히, 왜장 칸 마사가개(菅 正陰)는 이순신이 보낸 첩자 의기 ‘어란’과 하룻밤 풋사랑에 빠져 명량해로의 출발일자를 말해준다”는 것.

박 옹은 이와 관련 된 내용에 대해서는 ‘1597년 9월 14일 명량해전 이틀 전에 쓴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은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척 중 55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 하고 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김중걸이 말하기를 “왜선에 결박당하고 있을 때 김해인이라는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 풀어주며, 조선 수군 10여척이 왜군을 추살하여 보복하겠다며 전선 전체를 모아 조선 수군을 전부 몰살하고 명량해를 거쳐 경강으로 가겠다고 왜군들이 말 하더라”는 것이다’에서 찾는다.

두 번째는 조선왕조실록에 ‘선조 30년(1597년) 이순신은 왜선중에서 여인으로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라는 데서 여기서 말하는 여인, 김해인 즉, 김해김씨 성을 가진 여인으로 박 옹이 주장하는 ‘어란’여인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어란포에 정박했던 일본군이 명량해로 출발할 때 바다에 뛰어든 여인 부분에서 ‘살아서 끌려온 여자를 심문하니, 조선 여자 세 명이 적장 구루시마의 몸시중을 들었는데 한 명은 해남에서 출항할 때 물에 뛰어 죽었다고 했다’라는 부분에서 바다에 뛰어든 여인을 박 옹은 ‘어란’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박 옹은 “세계해전사의 유명한 명량해전에서 그저 하잘 것 없는 한 민초였던 ‘어란’이 호국의 여인으로 승화하고 나아가 아름다운 인간 사랑의 훌륭한 문화관광 자원으로 육성해 주기를 바란다”면서 “몇 년전 해남군에서는 간담회도 갖고 명지대학에 용역을 맡긴 것을 바탕으로 이번에 향토보호위 유적심의회에서 ‘어란’여인은 스토리텔링으로 관광자원화 하기로 하고, 어란 당집은 향토 유적으로 지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어란’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어란 자료집’ 일본어 번역본을 만들어 일본 도서관에지 비치 한 힘겨운 노력을 했다는 박옹은 “해남군은 아직까지도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못해 안타갑기만 하다”며 “‘어란’여인이란 두 글자는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에도 없다. 그러나 김해인 ‘어란’은 확실하고 분명한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을 무엇 보다 학계의 뒷받침으로 현실화 해 주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전해진 ‘어란’이야기의 줄거리는 앞서 비문에 새긴바와 같다.

어란진에 주둔한 간 마사가게는 이순신장군의 간첩인 미기(美妓) 어란과 애인관계로 사랑에 빠져 명량해전으로의 출전기일을 발설하고 ´어란´ 은 이를 김중걸을 통해 이순신군에 연락, 조선군이 대승을 하지만 결국 명량해전에서 애인 간 마사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에는 충성했지만 인간적인 양심의 가책으로 다음날 달 밝은 밤에 명량해가 보이는 서쪽바다에 투신한다.

명량해전 이튿날인 9월17일, 마을 앞 바닷가로 한 여인의 시체가 떠오자 이를 발견한 어부가 시신을 근처 소나무 밑에 묻고 묘 앞에 석등을 세우고 불을 밝혀 이 여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고 전해 듣고 있으며 지금도 매년 정월 초하루 동네주민 모두가 정성스러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편, 지난 12월31일 부친이 일제 강점기 이 곳 해남 어란국민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자신은 어란 태생인 일본인 고니시유이찌로(기업진단사)와 동생 고니시전히로씨는 자신들의 비용으로 어란 여인 비석 주변 여낭터에 표지석과 어란 여인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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