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국민대통합을 위한 선결과제<1>

▲ 광주의 한 대학에 걸려 있는 벽화.평양시내 한복판에나 걸려 있어야 할 내용의 벽화가 지금도 걸려있다.
애국논객 윤창중 인수위 수석대변인 발탁, 무엇을 의미하나?

윤창중 칼럼세상 대표가 인수위 수석대변인으로 23일 발탁됐다. 이를두고 당장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은 윤 대변인에 대해 ‘괴멜스’라고 비난하며 깎아내리기에 나섰다.

선거기간 동안 야당을 공격하고 종북세력 척결을 부르짖은 인사를 인수위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것이 국민대통합을 하겠다는 박 후보의 심산이냐는 것이다.

박근혜 당선인의 첫인사에 대해 민주당이 시비를 걸고 나온 것은 윤 대변인이 대선기간 내내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씨를 공격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논객으로 꼽히는 윤 대변인은 대선기간 동안 민주당의 야권연대 파트너였던 통진당 세력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 세력 척결에 가장 앞장선 인사다.

그는 선거기간 종북세력 척결에 대한 신념과 소신발언을 통해 보수유권자와 박 후보 지지층을 결속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실제로 그는 박 후보의 당선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제대로 세우고자 하는 애국세력의 역사적인 승리로 이번 대선을 정리했다.

그런 가운데 경찰대학 교수를 지냈던 표창원 씨가 22일 광주에 내려와 프리허그 행사를 한다며 몰려드는 군중들의 환호에 휩싸여 메가폰을 들고 광주시민들 앞에 나타났다. 표 씨는 “전국 최고 투표율을 기록한 광주시민들에게 감사하다”며 “절대로 절망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소리쳤다. 표 전 교수의 제안에 따라 한겨레신문 토요일 판을 사들고 모인 광주시민들은 “표창원”을 외쳤다.

이어 다음날에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우리 48% 국민들은 합리적 이성으로 이해 못할 결과에 외신이 모두 '독재자 딸 뽑은 나라'라는 기사 써 보내 창피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며 "그러나 보수들은 이런 국민에게 아위처럼 달려들어 여전한 악플과 악다구니 종북 좌빨 타령이나 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가 광주에 나타난 이유는 최고 투표율에 대한 보답차원이라고 하나, 전국에서 광주만 박근혜에게 7% 대 지지율을 보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해 북한 김정일 위원장 사망직후 광주지역 시민단체들이 김 위원장의 죽음에 즉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관련 기사.시민단체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선 경고하면서도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선 비애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좌빨 수뇌부들이 광주전남을 자주 찾는 이유

대선 직전 후보직을 사퇴한 이정희도 광주를 곧바로 찾았다. '27억 먹튀논란'에 휩싸인 이정희에 대한 비난이 전국에서 봇물처럼 쏟아지는 와중에도 정신적 위안처인 광주를 찾아 통진당 소속 기초의원 지원 유세에 나섰다. 그 결과 전국에서 '27억 먹튀' '종북 비난'이 거센 가운데도 불구하고 전남 여수와 화순에서 출전한 통진당 후보들은 보란듯이 당선됐다.

대선후보 사퇴이후 이정희의 지원사격 하에 화순에서 실시된 가선거구 군의원 선거에서 통합진보당 윤석현 후보(1만394표·43.72%)가 민주통합당 정철진 후보(1만35표·42.20%)를 누르고 당선됐다.

여수 바선거구에서도 통합진보당 김영철 후보가 5644표(30.13%)의 지지를 얻어 3명의 무소속 후보를 제치고 시의원에 당선됐다.

이정희 후보의 전국적인 지지율이 불과 1% 안팎인 것에 비해 전라도 지역에선 통진당 후보들이 얻은 지지율은 무려 30~40%를 훨씬 넘나드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통진당과 이정희에 대해 전 국민적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이곳은 무풍지대였던 것이다.통진당에겐 최후의 '버팀목' 이 된 지역이 바로 이곳 전남이었던 것이다.

이정희가 후보 사퇴 직후 호남을 찾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광주전남이 종북세력의 온상이자 거점으로 이미 자리매김 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왜 전라도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질까? 표창원 씨의 주장대로 광주와 호남에는 종북세력이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 호남에 종북정당이 자리를 잡았나? 호남에서 종북근성이 사라지고 있지 않는 걸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선동을 일삼는 사이비좌파 선동세력을 놔두고 박근혜 당선인이 부르짖는 진정한 의미의 국민대통합을 제대로 이뤄낼 수 있을까? 한번 파헤쳐보자!!

▲ 73년과 78년도에 치러진 총선결과. 당시 호남에서도 여당이었던 공화당이 야당보다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선거에서 영호남간 지역감정은 찾아 볼 수 없었다.
▲ 85년선거를 보면 심지어 경상도보다 전라도에서 민정당표가 더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대구가 제일 적다.하지만 88년 선거를 보면 이때부터 지역구도가 자리잡기 시작한다는 걸 명약관화 하게 알 수 있다.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평민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때 까지도 민정당은 여전히 20%를 초과한 지지세를 확보하고 있다.
영호남 지역감정의 책임 누구에게 있나?...박정희인가 아니면 김대중인가? 

좌측에 있는 사람 또는 호남이 고향이거나 호남의 정치권력(민주당 또는 반새누리 계열)편에 드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의 시초를 박정희의 영구집권 및 호남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하는데, 이러한 정서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때가 아니고 전두환 집권 후 5.18 이후라고 보는 것이 맞다.

전두환 정권에 반감이 극에 달했던 호남 정서가, 지역차별의 뿌리를 김대중이 선거로 이길 수도 있었던 박정희 정권까지 거슬러 올려버린 것이다.

박정희가 3번째 대통령에 출마한 것이 7대 대통령 선거이고,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헌법개정을 해야 했는데 이게 1969년 국민투표이고 여기서 전체 결과는 찬성 67% 반대 32%로 통과된다. 이중 전북은 62% 전남은 70%의 찬성율을 보인다.

여기까지만 해도 호남지역은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지지기반이다. 이후 헌법이 개정되고 박정희가 3번째 집권을 위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데, 이때 강력한 라이벌 호남의 김대중이 등장한다.

박정희 vs. 김대중의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53% 김대중 45%로 박정희가 당선된다. 중요한 게 이때 전북전남의 득표율을 보면 대충 박정희 35% 김대중 61% 정도이다.

한마디로 호남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을 보면 그냥 우리 고장 인물이니까 하는 소박한 표심이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선거의 근간은 영호남 지역주의라기보다는 학생 지식인 층이 많은 도시는 김대중으로, 산업화 및 농촌발전을 피부로 느꼈던 농촌지역은 박정희로 표가 몰린 도농간 대결 이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18대 대선 호남지역 박근혜 후보 지지율 도표. 무주가 1위,그뒤 전북의 부안, 진안, 군산 장수에 이어 전남에서 광양이 포스코 광양제철소 덕분에 14.7%를 기록 6위를 기록했다.광주는 7.7%를 기록 호남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이후에 박정희 독재의 서막이 된 1972년 유신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데, 92%의 찬성으로 통과된다.

호남지역에서 조차 전북 93% 전남 95%의 찬성율을 보였다. 그러나, 민주인사 및 지식인 계층에서의 유신헌법 반대가 극심해지자 박정희는 노무현처럼 나 대통령 못해먹겠다 하듯이 국민들의 뜻이 정 그러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테니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나섰고 실행에 옮겨 유신헌법 개정 후 다시 이를 1975년에 재신임 국민투표를 한다.

여기에서도 74%의 찬성으로 박정희와 유신헌법은 재신임 되고, 호남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북 72% 전남 76% 찬성율을 보였다.

이처럼 박정희의 유신 독재 체제 시절에도 호남 지역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이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고 TV나 신문 라디오 등 국민들의 정보 흐름이, 관에 의해 일방적이었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다.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이나 정치인들 외에는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을 시기였으니 유신 체제 시절에도 박정희 지지도는 호남지역에서 조차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피살이후 전두환 집권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화와 대통령직선제에 관한 6.29선언 이후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 대한민국의 정치지도는 영남과 호남의 지역대결구도로 변하여 확정되었고 이 지역구도는 2012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김대중은 애초에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락하면 자신은 대통령선거에 불출마한다고 선언하였었고, 이를 받아들여 전두환 노태우는 위에서 말한 6.29선언 후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이루어 냈으나, 후에 김대중은 자신의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그 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그리고 야권의 단일화 요구에도 거부하고 끝까지 완주하게 되는데 이는 김대중의 4자필승론에 기인한 것이다. '4자 필승론' 이란 김대중이 생각한 선거전략 이었는데, 노태우 경북, 김영삼 경남, 김종필 충청, 김대중 호남 이렇게 4명이 대선에 나오면 서울지역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았던 김대중은 호남지역에서 몰표만 나와 준다면 대통령 당선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4자 필승론' 전략이다.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라는 국민적 열망에 야권의 단일화만 이루어 졌다면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던 육군사관학교 군 출신 정치인들의 정권은 끝날 수도 있었으나 가장 강력한 당선 유력 후보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끝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독자 출마하는 바람에 표가 3등분으로 갈려서 13대 대통령 선거결과는 노태우가 36% 근처의 득표만으로도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지만 김대중 석방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광주지역에서 일어난 5.18 이후, 김대중의 광주 호남지역에서의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지지는 4자필승론에 더해저 놀라운 선거결과를 이루어 내는데, 광주 94% 전북 83% 전남 90%의 몰표를 받게 됩니다. 노태우 대구경북 60-70%, 김영삼 부산경남 50-55%, 김종필 충청 10-45%에서의 득표율에 비하면 압도적인 지지율이다.

결과론적으로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12대 총선 때 다수의 민정당 국회의원들을 당선시켰던 호남에서 이후 3년 뒤 88년 4월 소선거구제로 바뀐 13대 총선에서, 정적으로 맞붙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각자 상대 지역인 호남과 영남에서, 서로 극단적인 증오와 한풀이의 보복을 하는 듯이 악의적 지역감정을 부추킨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2편에 계속>
 

▲ 2006년 3월 전남 광양에서 반미단체들이 주도해 미군정비창이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이 시위로 인해 전남 광양의 시민사회단체는 급격하게 좌편향됐고 전남에서 가장 좌익단체들이 번성한 지역으로 전락했다.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설치된 노무현 대통령 기념동판.마치 북한에서 김일성 시찰현장에 붙어 있는 우상화 기념판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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