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고도 진 역대 정권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신성대 경기데일리 논설위원
언제나 그렇듯 대선 결과를 놓고 수많은 훈수꾼들이 연일 분석을 내놓고 있는데, 이번에는 모두들 승인보다는 패인에 열중이다. 투표율, 노인층, NLL, 트위터, 막말꾼, 날씨 등등 온갖 자료들을 두고 책상머리에서 계산기 두들겨 낸 보고들을 보고 있자니 쓴 웃음이 나온다. 비록 졌지만 그만큼 선전했으면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으련만 각종 진보성향 매체들의 부풀린 예측치를 벗어난 결과가 못내 아쉬웠던 게다.

기실 문재인은 애초부터 ‘깜'이 안 되는 후보였다. 그는 대선 출마를 고하는 현충원 참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묘만 참배함으로써 스스로 반쪽짜리 후보임을 자청했었다. 하여 과반을 넘지 못하는 지지였지만 국민대통합으로 온쪽짜리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박근혜 후보에게 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설사 반의반의 지지로 당선 되었다 해도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기본적인 마음가짐도 없이 대선에 나선 것 자체가 실수다. 옛 주인에게서 잘못 배운 탓이리라.

또, 사람에게는 급소가 있듯 전쟁에도 항상 전략적 요충지가 있다. 대개의 승패는 그곳을 누가 차지하는가에 따라 결정 난다. 이번 대선전의 승부처는 부산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 만약 부산이 뒤집어졌으면 동시에 울산 경남이, 연이어 수도권이 흔들리게 되어 있었다. 헌데 부산 출신의 막강한 안철수와 문재인이 연합하여 수없이 공격을 해댔지만 기어이 함락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게 민주당이 패한 진짜 원인이다. 박근혜에게 진 것이 아니라 부산성을 지키는 요지부동의 한 남자에게 진 것이다.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따라다니는 소통불능 이미지는 그동안 지나치게 원칙과 신뢰를 강조한 나머지 유연성을 잃은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건 자칫 고집, 독선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선거운동 기간 중 야당의 압박에 못 이겨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대해 사과하고 그 두꺼운 유리벽을 깨고 나옴으로써 하락하던 지지율을 반등시킬 수 있었다.

공약이나 스스로에 대한 다짐도 마찬가지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던지거나 꺾을 줄 아는 유연한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복지공약뿐 아니라 경제민주화, 국민대통합에도 나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일자리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거짓일 뿐이기에 말이다. 자본이나 기회의 재분배보다 노동의 재분배가 더 절실하다는 말이다. 인수위는 이런 점을 면밀하게 검토해 청사진을 그려나가야 한다. 선거 중에 내 건 공약만으로 국민들이 바라는 수준의 정치쇄신 어렵다. 보다 나은 정책개발과 자기혁신은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번 대선 유세 중에 박근혜 당선인도 반복해서 내년에 닥칠 세계적 경제 위기와 한국이 겪게 될 어려움을 강조했었다. 동시에 국민 모두를 잘살게 해주겠다거나 중산층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등의 장밋빛 공약을 내걸었다. 논리적으로 서로 상충됨을 알고도 국민들은 막연히 믿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확신이 가는 구체적인 경제성장책은 아직 내놓지 못했다. 이 살얼음 같은 신뢰가 깨어지는 날 모든 것이 다 함께 내려앉게 될 위험을 안고 새 정권이 출발할 것이다.

공약(空約)은 빨리 솎아 버려야

선거 때가 되면 정당은 더없는 이익을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준다는 약속 경쟁을 한다. 그렇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이런 공약은 다시 새로운 문제를 낳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당장 복지비와 반값등록금과 같은 약속이 그렇다. 비록 국가의 사명이라 하나 싸게(실은 비싸게) 먹히는 대규모 교육은 지식뿐 아니라 무지를, 성공뿐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인간적 한계이다. 결국 우리는 그 한계 내에서 제한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공약 경쟁으로 남발된 정책 중 상당 부분은 욕을 먹더라도 이제부터의 자체 혹은 외부 검증을 통해 폐기되어야 한다. 이미 국민들도 그 약속이 모두 다 지켜질 수는 없음을 알고 있어 어느 선까지는 용인할 수밖에 없다. 감히 절망에 다가가기가 무서워 매혹적인 주문에 몰려든 것뿐이니 말이다. 어차피 승자측에서 내건 공약은을 과반에 가까운 국민들이 동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수정 혹은 폐기 할 수도 있다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반대했던 국민의 요구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민정권의 토사구팽(兎死狗烹)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하나같이 대통령이란 사람이 그저 제 식구들 감싸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신, 또는 측근들이 사고를 치면 끝까지 감싸다가 욕먹고 망신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냉정할 땐 얼음칼보다 더 냉정해야 함에도 이 나라 문민지도자들은 언제나 그러질 못했다.

토사구팽이란 말은 문민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행했다. JP 덕분에 정권을 잡은 YS가 곧바로 그를 버렸고, 지팡이(JP) 짚고 소원을 이룬 DJ 역시 지팡이를 버린 일을 두고 사람들이 한 말이다. 그렇지만 앞뒤를 살펴보면 그 일들을 모두 ‘팽’이라 하기엔 무리였다. 둘 다 계약을 깬 것일 뿐이었다.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박정희만이 적절히 토사구팽을 잘 구사하였다.

팽도(烹道)는 치도(治道)

문민정부가 벌써 네 차례나 들어섰지만 아직 한번도 ‘팽(烹)’을 본 적이 없다. 이번 정권만 하더라도 주변에서 그의 형님을 비롯한 몇몇 가신들을 팽하라고 그토록 권했지만 이대통령은 흘려들었다. 결과는 줄줄이 감옥행. 한국인들은 육도삼략(六韜三略)만 병법인 줄 알지 토사구팽도 지도자가 반드시 행해야 할 치도(治道)인 줄 모른다.

팽(烹) 없이 정치하는 것은 호미 대신 낫으로 김을 매는 격이며, 고양이에게 어물전 맡긴 꼴이다. 동네 닭 잡아먹은 제집 개를 위해 변명만 늘어놓다가 글자 그대로 ‘개망신’만 당했다. 사냥이 끝났으면 개들은 삶거나 우리(국회) 안에 가두고, 소나 말을 끌고 나가 논밭을 갈았어야 했다. 그동안의 문민정권마다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이 팽도(烹道)를 모르는 최고지도자들 때문이라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는다.

주군(主君)을 모시는 가신들도 자신이 사냥개인지 소인지 분수를 알아 처신해야 명(命)과 명(名)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다. 아무나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주군을 모시는 것과 국민을 받드는 것이 같지 않고, 주군의 마음에 든다고 반드시 국민의 마음에 드는 것 아니다. 사냥과 농사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국가원로원 창설을

이번에 안철수가 끌어들인 윤여준과 김종인 때문에 기억에도 가물가물하던 왕년의 정객들이 거의 모두 대선판에 몰려나왔다. 그 연세에도 정치에 대한 열망이 그토록 대단할 줄 우리는 미처 몰랐었다. 그런 한편으로 그동안 역대 정권들마다 원로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해 본다. 하여 이번 기회에 그분들의 경륜과 지혜를 국정에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씽크탱크로서의 자문기구를 만들었으면 한다.

대통합이란 구실로 이번 선거 과정에 기실 너무 많은 인사들을 끌어들였다. 아차직하면 자중지란에 빠질 공산이 상당히 크다. 그동안 주군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땀 흘린 측근들부터 한없이 낮춰야 할 것이고, 원로들은 하루 빨리 물러나 젊은이들 마음 놓고 일 할 수 있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 또한 교수들도 정책자문으로 만족하고 학교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팽(烹) 없인 대탕평 없다

20일 저녁, 인사동 한 밥집에서 너 댓 명이 모였다. 이번에 새누리당 부산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전 주일대사 권철현 씨와 함께 한 자리였다. 그는 부산호남향우회까지 찾아가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어야 할 당위성을 열변하며 지지를 호소했을 만큼 두 강적을 맞아 온몸으로 부산을 사수해낸 인물이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먼 길을 올라와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지인들과 어울려 문화니 역사니 하는 주제들로 한바탕 이야기꽃을 피웠다.

반주 한잔으로 회포를 풀고 해단식을 위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다며 깊은 밤 속으로 총총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 보며 필자가 ‘백전노장 야전사령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자, 곁에 섰던 묵개(默介)처사가 ‘아무튼 박근혜 후보가 사람 하나 잘 골라 승리한 것 같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저녁 내내 이번 승리에 대한 자랑이나 논공행상에 대해 말 한 마디 없었던 것이 떠올라 ‘저런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세상이 굴러가는 것 아니겠냐’며 다들 흩어졌다.

전쟁에서 이기고 망한 나라는 역사상 수없이 많다. 승리에 도취해 자만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권이나 인수위에서부터 온갖 구설수에 휘말렸다. 전리품을 두고 극렬한 내부투쟁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특히 두 달 여 동안 벌어지는 인수위의 활동과 인선과정은 정권의 성공 여부를 대충 결정한다. 모두 다 조타실로 올라갈 수는 없다. 더 많은 이들이 기름내 나는 기관실로 내려가야 한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다. 어느 하나라도 역대 정권들이 저지른 실수나 구태를 반복한다면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정권에 대한 평가의 절반은 이 몇 달 사이에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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