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 칼럼] 안철수 백신의 불편한 진실

상처받기 쉬운 우리 사회에서는 시시각각 무슨 일이든, 특히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예기치 않은 폭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재앙,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등 이젠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야말로 유일하게 확실한 일이 되어버렸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매번 진보가 이루어질 때마다 끔직한 후퇴가 따름을, 힘의 과시는 연약함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악이 정복되고 수많은 불의가 폐기되었음에도 이 순간 그 모두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할 따름이다.

행동 속에 도덕의 부재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이고, 책임의 결여는 도덕의 거대한 결함이다. 부인의 다운계약서 작성에 대해 바로 사과했던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다음날 자신이 직접 작성한 다운계약서에 대해 전날 사과로 갈음한다고 했다. 똑같은 잘못이니 굳이 똑같은 말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오만과 건방이 하늘을 가리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당시의 관행이라고 얼버무리는 토를 달았다.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다 꾸중 들을 때면 “쟤도 그랬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곧이곧대로 신고한 대부분의 정직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아무렴 아직도 이 나라엔 딱지나 다운계약서는 고사하고 정식매매계약서 한번 작성해 보지 못하고 전세 월세 사는 국민들이 적지않다. 그분들은 재개발 딱지, 두 잘난 부부의 각기 다른 다운계약서 얘기 듣고 나서 무슨 기분이 들었을까? 책임지는 리더의 자세가 아니다.

관행을 따르지 않으면 바보로 만드는 나라

관행이고 사과했으니 책임 없다? 언제부터 이 나라에선 관행이라면 불법이든 부도덕이든 모조리 용서되고 묵인되게 되었는가? 그게 부패한 정치인 및 관료들을 혼내주겠다고 나온 정의의 사도 안철수 후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관행을 들먹이자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장기집권, 유신도 진즉에 그 딸이나 가족 중 누군가 사과 한마디 했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 않은가? 왜냐하면 후진국, 미개발국들에선 독재나 장기집권이 흔히 있는 관행 아니던가?

관행이라면 용서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안철수 후보가 꿈꾸는 혁신 사회던가? 그가 말한 상식에는 그런 불법적인 관행도 포함되는가? 논문 공동저자 올리기, 박사논문 표절 의혹, 모두가 관행 혹은 관례라고 둘러댈 텐가? 앞으로 또 어떤 관행이 터져 나올지? 이러고도 계속 도덕성이란 수식어를 이름 앞에 붙이고 다닐 것인가? 그동안 자신이 베푼 선행에 비하면 그따위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상대적 덜 불결함’을 주장할 것인가?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인사청문회 같은 건 굳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약자를 위한 도덕과 강자를 위한 도덕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자칫 도덕에 대한 부정일 테니 말이다. 무수한 지도자들은 이 공개적인 ‘엄한 취조’가 지나치고 무익하고 비생산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재건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한들 유독 안철수 후보에게 엄격한 도덕주의의 기준을 들이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유무죄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훌륭한 양심’을 진정 가지고 있는지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안철수 백신의 불편한 진실

안철수 후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한국 최초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었다는 사실과 또 그 귀중한 것을 국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일에서부터이다. 그것도 기업들에겐 유료로, 개인에겐 무료로! 멋진 일이 아닌가! 이후 그의 선행은 애국적 자선으로 알려지며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국민들의 호감을 얻어나갔다. 그리고 그 호감을 바탕으로 정부의 지원도 받고 국민들의 지지도 받았다.

이 일을 한 번 뒤집어 보자. 그가 처음 개발한 백신은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었다. 당시에는 개인용 PC가 지금처럼 복잡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개발비도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한국에서 PC를 사용하는 기업은 물론 개인들이 프로그램을 돈 주고 사다 쓰는 풍토가 아니었다. 해서 어차피 수익이 신통치 않은 개인들에게 무료로 나눠줘서 선발 업체로서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마케팅전술인 게다. 헌데 그 일을 애국적 자선으로 홍보를 하자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간 것이다. 그 결과 안철수 개인의 이미지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매스컴의 중요성과 그 활용법을 터득한 거다. 그리고 그 착한 이미지로 기업들을 압박하여 원하는 수익을 얻어낼 수 있었고, 후발 업체들도 모조리 따돌리고 독점할 수 있었다.

잘난 체하기 위한 자선

바이러스 백신은 진단과 치료라는 두 가지 상품으로 팔려나간다. 처음에는 이 둘을 모두 개인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하지만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한 후에는 진단용 백신만 무료로 주고 치료용 백신은 돈을 받았다. 각기 따로 1백 원씩 받는 게 아니라, 진단은 무료, 치료는 2백원을 받아내는 꼴이다. 결국 그게 그거지만 이왕 자선했다는 칭찬 듣고 고객으로부터 기분 좋은 수익을 얻어내는 것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을 기업들로부터 올릴 수 있었다.

이때 터득한 애국적 포장술은 안철수 개인의 인생궤도를 바꿔 놓는다. 서울대 의대 졸업, 인턴을 거치면서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처지고, 그마저도 서울대에서 단국대 교수로 밀려난 열등감. 혈액검사, 세균검사 등 병리학과 비슷한 이름의 컴퓨터 바이러스와 백신 개발로 행로를 바꿔 성공했다지만 마음 한구석의 응어리를 풀 길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안철수’가 서울대 의대교수들보다 훌륭해져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살아온 것이다.

안철수의 최고병은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었다 할 수 있다. 하여 회사의 이미지는 곧 안철수 자신의 이미지가 되어야 했다. 좋은 일, 착한 일은 모두 안철수여야 했다. 그래서 안철수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인 것이다. 해서 회사는 물론 기부재단 이름도 ‘안철수’를 고집하는 게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는 것이다. 매사를 이런 식으로 자기미화하다 보니 차츰 메시아적 망상에 빠져든다.

절대반지를 빼앗긴 안철수

“어찌 서울시장 같은 작은 일에 연연하십니까? 대통령이 되셔서 큰일을 하셔야지요!”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하여 냉큼 박원순에게 절대반지를 넘겨주고 만 것이리라. 그리고 대선, 안철수는 박원순 사단이 만들어 준 보은(報恩)의 가마에 올라앉았다. 임금이 되고 안 되고는 팔자소관, 암튼 절대반지가 아직도 자기 것인 양, 자신에게 절대적인 힘이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게다.

노동계를 위해 전태일이, 진보를 위해 노무현의 희생이 필요했듯 다가오는 시민사회를 위해 또 하나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그게 안철수인 게다. 박원순의 차기 대권 도전의 노둣돌[乘馬石]로 이만한 게 어디 또 있으랴! 이번 기회에 그동안 끌어모은 오합지졸 시민연대군을 실전 훈련시켜 정규군으로 양성해 5년 후를 대비하고자 하는 것일 게다. 허니 이제 안철수는 가마에서 내리고 싶어도 못 내린다. 멀미를 못 견뎌 떨어져 죽는다고 해도 시체를 관에 넣어 끌고 다니면서라도 전쟁을 치를 것이다.

'안철수'는 없다. '안철수 후보'만 있을 뿐!

안철수 후보의 주변엔 그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랬다간 바로 아웃이다. 해서 그의 주변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사람을 함부로 버린다고도 볼 수 있다. 현재 그의 주변인들 중 몇몇 오래된 부하직원들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1년 미만의 인맥들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에겐 친구도 동지도 없다. 의료계든 IT계든 그와 평소 호감을 갖고 지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 외로움을 대중들의 선망으로 메우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토록 사회성 부족한 사람이, ‘책임의 가치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일국의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

영업전략의 애국적 포장, 약간의 성공과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자기도취, 그로 인한 메시아적 환상에 사로잡힌 일개 청춘 멘토의 대통령 꿈. 정치 경험 전무한 인기 밴처기업인이 졸지에 정치의 최고 정점인 대통령을 해보겠다는 거나, 맡기면 재미날 것 같다는 상상을 하는 국민들이나 겁이 없기는 마찬가지. 대중들이야 경영이나 행정이나 정치나 다 그게 그건 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 이보다 위험한 일이 어디 있으랴. 지난날 ‘놈현스런’ 악몽을 벌써 잊었나? 무슨 미련이 남아 또 ‘철수스런’ 꿈을 꾸는가? 이게 현실이면 코미디는 또 뭔가?

비록 기성 정치인 내지는 정당들이 무능하고 부패했다고는 하지만 부패는 권력의 속성. 뿌리 뽑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고 칠 때마다 벌주고 쫓아내기도 하면서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고 있다. 과거에 비해 그만큼 우리 사회가 투명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험 미숙에서 온 최고지도자의 실책은 언뜻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드러난다 해도 벌줄 수도 쫓아낼 수도 없다. 당연히 그 재앙은 고스란히 대통령이란 자리를 두고 도박을 벌인 국민의 몫이다.

우리는 속고 만 것이다!

도덕은 보편적이다. 지도자는 도덕에 굴복해야 한다. 그래서 지도자는 참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도자인 이상 대중의 표적이 되며, 모범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도덕을 존중해야 한다. 지도자의 주요한 가치 기준들 가운데 하나는 단지 재정상의 성공이나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에 세울 도덕을 존중하느냐 안하느냐이다. 무엇보다 오늘의 도덕은 책임에, 다시 말하면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를 책임지려는 의지에 기초를 둬야 한다.

세상에 뭔가 아름다운 것이 존재한다면 그건 희귀하고 접근이 어려워야 한다. 모두에게 개방되어 버리면 그걸 모욕하는 꼴이 된다. 출마 선언하자마자, 예상대로 초벌도 굽기 전에 그만 주둥이 깨어지고 몸통에 금이 가고 말았다. 단순하고 감정적인 일부 국민들과 권력을 갈망하는 위선적인 엘리트들의 부추김으로 인해 더없이 괜찮은 촉매제 하나를 잃었다. 안철수가 후보로 나선 이상 촉매자가 아니다. 이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한낱 몽상가일 뿐이다.

잘난 체하는 재미에 빠져 인기가 곧 정치인 줄 착각하고 있는 안철수 후보. 그렇고 그런 정치 쇼에 짜증난 관중들은 프로답지 않은 한 신인의 어눌한 쇼에 열광하고 있지만 그마저 싫증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되돌아갈 다리도 불살랐다 했으니 결국 사금파리로 밟히든가 박제가 되는 길뿐이겠다. 하지만 이미 그 역시 ‘관례화된 탈선’에 익숙한, 그저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을 뿐임이 드러난 이상 그다지 애석해할 것까진 없는 것 같다. ‘훌륭한 양심’이 아니라면 ‘안철수’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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