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믿을 수 없는 일은 남민전 사건부터 동아대 사건에 이르기까지 좌파에 의해 민주화투쟁으로 뒤집어진 수많은 공안사건들이다. 특히 남민전은 월남이 공산화된 직후 무장혁명을 꾀하던 전형적인 간첩사건이다. 예비군 훈련소에서 무기를 도둑질 하는가 하면 다이너마이트까지 입수한 자들이었다. 물론 김일성에게 보내는 충성맹세문도 있었다. 웃기는 일은 시인 김남주를 비롯
좌파정권 시절, 정권과 그 추종인물들이 우리 사회를 이간질시키기 위해 2%와 98%를 대립시키면서, 2%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얼마나 심어주었는지 모른다. 그 2%란 대부분 기업인들과 혹은 자영업자들이었다. 이들은 잘 살기 위해 남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하면서 솔선하여 이 나라를 선도하였고, 기업을 만들어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20년 친구사이라는 안철수 측근 금태섭과 박근혜 캠프 공보위원 정준길, 이 둘의 공방(攻防)이 재미있다. 친구 사이에 나눈 말이 누구에게는 협박이 되고, 누구에게는 조언(助言)이 되기도 하는 그런 것. 그러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친구 사이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는 정치판의 야비함이 돋보인다. 야비함이라. 이것은 안철수의 순진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
이명박 대통령 님을 욕하는 인물들과 단체, 정당을 살펴보면, 현재 북한지역을 불법점거하고 있는 김씨 일가와 그 세력들, 또한 일부 극우세력들과 민통당과 통진당, 그리고 호남 내에 야권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다. 대체적으로 이명박 대통령님을 겨냥한 욕은 조건과 논리적 근거가 약한 무조건적인 것이었고,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실은 것이다. 한마디로 욕을 위한 욕이었
역사는 우리 호남인들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고, 강토를 굳건히 지켜온 아름다운 사람들인가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또다시 호남인들의 의기를 살려, 대한민국을 풍한(風寒)과 진토(塵土)에서 구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망하던 시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가장 전라도 사람다운 민초(民草)를 들으라면, 전북 진안 마이산에 120여개의
필자(筆者)가 동학혁명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 아팠던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적을 향해 나아가던 사람들은 평소 타 지역이나 권력자들로부터 천대받고 멸시 받았던 설움 많이 받던 전라도 민초(民草)들이었다는 점이다.전라도 사람들을 구박하고 손가락질 하던 자들은 국난을 만나 매국노로 변하였으나, 천대 받던 전라도 사람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진정 호남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사랑받고자 한다면, 옹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는 가슴을 열어야 한다. 더 이상 한(恨)을 말해서는 안 되며, 복수를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미 충분할 만큼 민족과 역사의 사죄를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어느 누구도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취직과 승진과 결혼에서 우리는 광명한 세상을 얻었다. ‘호남의 단
오늘날, 이 엄혹한 전라도 풍경 속에서도 박근혜에 대한 전라도의 지지도가 20%가 넘는 것은 바로 전라도 사람들의 정 많은 심성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한 어떤 그리움이 있고, 가난을 벗고 잘 살게 된 현실에서 보답(報答)을 찾고자 하며, 이어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박근혜 대표의, 대통령이라는 존엄성에 근접하는 단아한 귀족풍의
과거 깊어가는 지역감정을 보며, 망국론까지 생각하였던 정치인들은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다양한 해법을 내놓았었다. 마치 영조의 탕평책처럼 고른 인재 등용과 같은 지역감정 해결책은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주효(奏效)하지 않았다.이유는 당시 지역감정을 해소하고자 하는 정치권력들이 보인 것은 농림부장관 자리나 하나 던져주는 무성의(無誠意)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 전
(이 글은 2010년 3월 31일 초판을 쓰고, 2011년 3월11일 오후 2시 45분에 닥친 거대한 쓰나미를 보고 쓴 글이다. 그리고 지금 일본이 종군위안부와 독도 문제를 놓고 반응하는 천인공노할 짓에 대해 글을 덧붙인다.)2011년 3월 쓰나미로 인해 무너지는 일본의 겁난을 지켜보면서, 이토록 강한 신벌(神罰)이 내리는 것을 보고 다만 숙연해진 바 있다
현대 한국사에서 호남 차별과 박해는 자유대한민국이 보인 마지막 야만이었다. 이 야만은 많은 불행을 낳았고, 그 불행 중 하나가 김대중에 대한 호남인의 절대적 지지였다. 절대적 지지는 호남인의 생존에 관한 갈망을 담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중환자마저도 투표장으로 나섰던 것은 당시 호남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같은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모두가 평등
결국 오늘의 비극은 지난 조선조 선조 이후 420여년에 걸친 전라도 핍박과 멸시와 천대가 그 원인이었던 것이다. 모든 전라도 사람들과 북한에 의해 조종되는, 소위 민주화라는 이름의 좌익들은 적극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호남 출신 국정원 직원이 정보를 김대중의 민주당에게 주고, 정권 교체 후 국정원으로 금의환향 회귀할 것을 장담한 일화도 있었을 만큼, 김
전쟁이 끝나고 이 폐허의 강토에는 오직 눈물과 가난과 슬픔만이 떠돌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음악과 노래와 시는 모두 슬픔과 이별을 소재로 담고 있었다. 밝은 노래, 흥겨운 시가 있을 수 없는 초토화된 나라였다.제주 4.3 폭동이 마무리된 것은 6.25 휴전 이후 1954년 9얼 21일까지 ,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씨가 체포된 것이 1963년 11월
3․4부에서 살펴본, 지역혐오감과 차별에 대한 역사성이 거의 유전적이며 진화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황윤석 이후 나타난 고매한 학자 성호 이익마저 그런 평을 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은 서적과 구전(口傳)을 통해 얻어들은 것들이 악의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왜냐하면 성호 이익이 전라도에 대한 악평을 쓴 근거를 대지
이지양의 논문을 빌려 1764년 5월 20일자 일기를 보면, 이 날 황윤석은 서울 선비 김원행과 만났는데, 김원행이 영호남을 비교하는 일화가 실려 있다. 김원행은 황윤석에게 박찬혁이란 선비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이 사람은 바탕이 돈실하니 영남 사람인 듯하다. 장래에 큰 일이 있으면 그것을 해낼 듯하다. 호남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속임수가 많다고들
필자(筆者)가 이 글을 연재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북한의 남남갈등 조장(助長)을 위한 공작(工作)을 막고자 함에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 내부의 분열을 노리기 위해, 오래 전부터 호남과 타 지역 간의 갈등을 조장해 온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지역감정이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발생, 심화했다는 내용을 전교조 일부 적색교사를 통하여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진보좌파 내
전라도란 지역명은 당시 호남의 중심도시인 전주와 나주를 합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한때는 마한의 역사에서 백제의 고을로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던 곳이었고, 若無湖南(약무호남) 是無國家(시무국가)란 말에서 기억하듯 이순신 장군의 호국(護國)의지(意志)에 부응하여 나라를 지켜냈던 충렬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전라도의 특징을 풍전세류(風前細柳)라 평하기도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사랑과 평화는 싸우지 않고도 공존할 수 있는, 갈등과 반목 속에서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길과 방법을 가르쳐 준다. 나는 약 10여부로 전개될 ‘호남은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진정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다. 민족 화합과 통일, 얼어붙은 전라도 사
낙타를 보면,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열사(熱沙)의 사막을 소리없이 끝없이 쉬임없이 걷는 낙타. 등에는 두 개 혹은 한 개의 혹을 짊어지고, 마치 도인(道人)처럼, 수행자처럼 걸어가는 낙타. 누가 뭐라 하든, 비바람이 몰아치든, 태양이 뜨겁든 말든, 주인이 가라고 외치든 말든, 발이 빠지든 말든, 누가 곁에서 죽든 말든, 갈 곳을 향해 묵묵히 걸어
박근혜 대표가 대선 출마를 결정하자, 야당들이 일제히 정수장학회를 거들고 나섰다. 이에 필자(筆者)도 한마디 안할 수가 없다. 아예 골수까지 빼먹으려 드는 야당인사들의 야비한 언행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질타와 함께 그들의 언행에 대한 통제를 가(加)하기 위해서이다.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는, 혁명 직후 1962년 부일장학회에서 5.1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