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하늘이라 부르고, 땅을 땅이라, 꽃은 꽃이라 부르는 사람은 더 이상 교육시킬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정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요, 사물과 현상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반면 교육과 체벌이 필요한 자는 하늘을 하늘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땅을 땅이라 판단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하늘을 하늘이라 인식하게 하고, 땅을 땅이라 부르게 만들어야 한다.그러나 만약 하늘을 하늘이라 부르게 하지 못하게 하고, 땅을 물이라 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마땅히 이런 자들을 우리 사회에서 축출시켜야 한
김자옥은 4월이다.그녀가 가리키는 캘린더 4월을 열면 꽃이 핀다.김자옥은 봄을 여는 첫 꽃잎이다.산수유보다도 매화보다도 복수초보다도김자옥은 맨 먼저 봄을 알린다.4월 첫날이 만우절이기에 김자옥은 더욱 좋다.봄 같지 않은 봄이 와도김자옥은 봄이에요 라고 말한다.산골에 흰눈이 내리는 날이어도김자옥은 그래도 봄이에요 라고 한다.바람이 불고 찬비 내리는 날에도김자옥은 봄이 맞잖아요 라고 한다.설령 겨울옷을 입고 있더라도또한 썰렁한 들판을 걷고 있더라도꾀꼬리 고운 목소리를 빌려그녀는 우리를 속일 줄 안다.그래서 김자옥은 희망으로 남는다.그리
군을 무력화시킨 문재인 정권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멈춘 지 두 달이 됐다. 미국은 도발 60일 중단’을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한 필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했고, 유엔은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말자는 휴전 결의를 채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무력시위에 겁먹은 김정은은 추가 도발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동해에서는 미국 항공모함 3척이 투입된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을 하는 등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여전히 고조되고 있다.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 1명의 귀순 과정에서 북한은 40여발을 남
‐ 서해해전으로 전사한 6인의 해군용사 장례식 때, 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하게 오직 전두환 대통령만이 문상(問喪)을 했다. 바로 이 점,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위해 향불을 올리며 고개 숙이는 이 모습은, 오늘날 왜 다시 전두환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지도자는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쓴 전두환 찬양시로 알려진‘처음으로’란 시는‘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로 시작한다.틀림없는 사실의 기록일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3. 비자금1985년에 있었던 국제그룹 해체 사건은 전두환의 대표적인 실정(失政)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한국의 기업 풍토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설혹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권력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권력에 의해 공권력과 금융 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공포에 질린 기업들의 자발적인 정치헌금이었고, 이는 고스란히 대통령의 통치자금이나 비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무려 2000억이니 3000억이니 하는 비자금은 지금으로 보면 20조나 30조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전두환은 재임 시절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였고, 연좌제를 폐지하였으며, 사교육을 금지시키는 한편, 적자투성이 무역수지를 흑자로 전환시킨 대통령이었다.그러나 완벽한 인간은 없다. 나 또한 너 또한 부족한 인간이다. 전두환 역시 이 인간의 부족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그리하여 내가 부족한 인간일진대, 전두환의 부족함을 지나치게 탓하지 말라. 그의 공(功)과 과(過) 역시 한편으로만 치우쳐 바라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공(功)은 공(功)대로 과(過)는 과(過)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우리는 부족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
- 김대중은 정권을 잡자, IMF에 관해 이런 말을 남긴다.“그 많은 돈이 사라져야 할 국가적인 재난도 없었고, 전쟁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김영삼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도가 나고, 자살하고, 가정이 파괴되었는지 모른다. IMF는 20세기말 6.25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이 겪은 처참한 비극이었고, 5000만 국민들이 너나없이 겪은 깊은 시련이었을 것이다. 모 방송에 ‘자연인’을 다룬 프로가 있다. IMF로 인해 가정이 파탄난 사람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살고 있었다. 그
- 1995년 11월 27일, 대한민국 사법은 진실과 원칙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니라 정권의 시녀(侍女)로 전락한다. 11월 24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5.18 특별법을 수용하고자 한 3일 후였다. 내란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드디어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소급입법을 금(禁)한, 이른바 민주주의를 짓밟는 민주화 세력의 역설이 시작된 것이다.이에 전두환 노태우 변호인단은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는 이미 재판의 결론을 내려놓은 정치재판이자 기교재판이었고, 그 어떤 변론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기
전두환 대통령의 호(號)는 일해(日海)이다. ‘해 뜨는 바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호를 알고는 있으나, 설마 이 호를 탄허스님이 지어준지는 모른다. 잘 알려진 바대로 탄허스님은 민족의 영광을 예언한 우리 시대의 큰스님이셨다. 아마 불자(佛者)치고 탄허스님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법정스님도 백담사에 있는 전두환 대통령을 자주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많은 스님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백담사행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큰스님들치고 전두환을 찾지 않은 스님은 드물었다고 본다.
지금 문재인 정부와 정치세력들은 개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말만 있을 뿐이지, 개헌의 목표와 의도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찬반의 공방도 없고, 민의(民意)를 추출할 토론의 광장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개헌이 대한민국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좌파정권의 연장을 노림인지에 대한 국민적 판단도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과정이 없는 것이다.그러나 전두환은 비록 내각제에 대한 꿈을 접었지만 최선을 다해 9차 개헌을 했고, 그 헌법으로 문재인까지 무려 7기에 이르는 6공화국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
-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 선언은 전두환의 구상과 결단에 다른 소산(所産)이었다. 노태우는 자신이 한 일이라고 주장하나, 당시 통치구조상 전두환 재가없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유명무실한 헌법위원회를 없애고 헌법재판소를 만든 것도 전두환 작품이었다. 6월 항쟁은 오직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을 뿐이고, 이는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 -전두환은 1986년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하자, 그때에야 비로소 얼어붙은 정치를 해금시킨다. 경제에 자신이 생기자, 드디어 정치선진국으로의 길을 향해 물길을 튼 것이다.1987년 6·2
- 미국 유학 중이던 장남 전재국은 부친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을 진언한다. 내각제와 직선제 사이에서 고민하던 전두환은 결국 직선제로의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6.29 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1. 의원내각제전두환은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를 선호한 사람이었다. 대통령제의 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는 내각제를 선호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오늘 여러분에게 처음 말하지만, 나는 솔직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두려운 때가 많았다.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기 위해 다들 서류를 잔뜩 챙겨오는데,
단임이란 용어는 원래 정해진 임기를 다 마친 뒤에 다시 그 직위에 임용하지 않은다는 의미다.전두환은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온, 대한민국 현대사에 기록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달라이 라마는 ‘욕심의 반대는 무욕(無慾)이 아니라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이다’고 하였다. 전두환은 달라이 라마가 말한, 잠시 머무름에 만족한 행복한 위인(偉人)이었다.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 올바른 인간이다. 탐욕이 지나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우리는 삶의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보고 겪는다. 지나치게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게 넘치지
만약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아웅산 태러 즉시 북한과의 전쟁에 돌입하거나 복수를 선택했더라면, 대한민국 경제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보복보다는 경제를 선택한다. 필자(筆者)가 전두환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두환은 어떤 문제를 만나거나 난관에 부딪혔을 때, 상황을 피해 우회적으로 돌아가거나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직선적인 사람이며, 어떤 험로(險路)를 만나더라도 주저 없이 그대로 돌파해버리는 무인(武人)다운 추진력을 갖춘 사람이었다.경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제가 위기에 있음을
우리 정치사에서 전두환의 등장은 정말 운명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고 난 뒤,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대처한 이가 전두환이었다. 보안사령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범인 김재규를 체포하는 일이었다.김재규 체포 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에 오른 최규하. 그러나 전두환은 최규하가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무려 4시간이나 침묵을 지킨 점을 주목한다. 김재규와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전두환은 신현확 전(前) 총리를 찾아가 대통령직 수행을 요청
1980년대 우리는 전두환 전(前) 대통령을 ‘돌’이라 불렀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지적인 풍모가 없는 담담하게 생긴 그의 외모와 벗겨진 머리, 그리고 이름 두환에서 ‘두’를 연결시켜 ‘돌’이라 불렀다.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의 이미지는 정말로 ‘돌’이었던 것 같다. 돌처럼 강하고 돌처럼 우직하고 돌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 전두환은 처음과 끝이 변함없이 한결같은 성격의 위인(偉人)이었다.그처럼 전두환은 솔직담백한 성격을 지닌 무인(武人) 기질의 대통령이었다. 만약 모든 것을 제쳐두고 성격만으로 역대 대통령을 평가하라면,
‘1988년 3월 3일 일본 교도통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영국과 서독의 유력의원들에 의해서 올해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고 일본 교토통신이 오늘 보도했다.교토통신은 유럽 의회 관계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이유로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며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대통령직을 떠난 점도 추천 이유에 포함됐다고 밝혔다.’Ⅰ. 전두환과의 재회(再會)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민주주의를 ‘파르헤지아 실천의 조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어로 ‘Fre
필자(筆者)는 지금 시인의 가슴으로 글을 쓴다.5.18을 향한 애증을 거두고 뜨거운 사랑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여, 필자(筆者)는 호남인이지만 호남과 비호남의 중립에 서서 5.18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곳은 좌와 우를 논하는 이념의 중립지대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시인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5.18에 관한 소인(小人) 정재학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셨으면 한다.1980년, 대한민국은 격랑에 휘말리고 있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있고, 12.12 사태로 드러난 신군부의 집
숨이 막히도록허공을 지배하는 연분홍 모든 것,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꽃잎, 꽃잎들 너의 품흔들리는 꽃송이로 채워지고 화산이 폭발하듯 개화하는 날찬란한 빛과 빛 사이 어디,새소리 한 점 스며들겠는가. 그러나 지나간 몇 날이었던가. 유리창이 깨지듯 오늘 아침무수히 부서지며 떨어지는 낙화 드디어 탐욕이 사라진 푸른 하늘가홀로 남은 나목(裸木)의 거울을 본다. 떨어지는가, 꽃잎이여무수한 찬탄과 무수한 웃음과 무수한 추억, 그리고 불씨의 고독을 안고 다음 봄을 위하여너는 떨어지고 있는가. 2017. 4. 7완도에서 정재학
호남사람들이 김대중을 떠올릴 때마다 고개를 돌리거나, 잊고 싶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의 거짓말이었다. 그의 정치생활을 뒤집어보면, 한심할 정도로 많은 거짓말을 한 것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우리 국민들에게도 각인(刻印)된 김대중의 이미지는 거짓말 = 김대중이었다.일례(一例)로, 그의 거짓말이 총 집대성된 것이 바로 햇볕정책이었고, 오늘에 이르러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던 북한을 회생시키고자 하였던 거짓말로 드러나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숨길 수 없는 진실이 바로 김대중은 거짓말쟁라는 것이었고, 이 문제에 관한 한